재잘재잘+ㆀ/'사랑이사랑에게'

번역하는 남자편...

miniwind 2006. 8. 28. 21:36

저녁 7시40분발 기차를 오전 6시부터 역에 앉아 기다리는 일,
오늘부터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리는 일,
그런 건 힘들지 않아요.
정확한 시간만 정해져 있다면, 1년이 아니라 10년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.
아니,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어요.

내가 가장 버티기 힘든 건,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건
그 끝을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기다림입니다.
하루 종일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거예요.
그래서 휴대폰을 바꾸면서 번호까지 바꿔버렸습니다.
그녀를 향한 무모한 기다림을 끝내고 싶었거든요.
헤어지고 나니, 고 쬐그만 전화기가 나를 옭아매고 꼼짝 못하게 하더라구요.
혹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..
그녀와 찍었던 사진을 보고 또 보고..그녀와 함께 한 순간순간이 다 떠올랐습니다.
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름을 처음 입력하던 순간,
수십 번 물어보고 싶었던 그녀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던 순간,
그녀를 깨워주기 위해 설정되어 있던 오전 6시 알람,
처음 같이 밥 먹었던 삼겹살집,
100일 되던 날 선물했던 장미 스물다섯 송이,
그녀가 싸온 김밥을 먹으며 처음 손잡았던 놀이공원 벤치..
내가 처음 번역한 책 앞에서 기념 뽀뽀..
지금쯤 그 전화기는 그녀와의 모든 추억이 삭제된 후,
어느 중고 가게에 놓여있거나..아님 이미 새 주인을 만났겠죠?

전 외국 도서를 번역 하는 일을 하고 있는 번역 작가 입니다.
며칠 전에 일이 하나 들어왔는데, 소설 번역 일이에요.
근데 머리가 무거워서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습니다.
어젯밤에 시작을 해 볼까, 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...
또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와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.
한 달에 한 번 정도 만취 상태에서 전화를 걸어
"민지니? 넌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..난 안 괜찮다"
이 말만 계속 되풀이 하다 끊어버리는 남자에요.
아마 이 번호의 전 주인이 '민지' 라는 여자 분이었나 봐요.
그 남자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냉정하게 뚝, 끊지 못하는 이유는
혹시 그녀도 내 예전 번호로 한 번쯤 연락을 해 봤을까,
그 번호의 새 주인에게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지는 않을까,
하는 생각이 들어서요. 물론 그럴 리는 없겠죠.
근데 이 번호의 전 주인은 왜 번호를 바꿔야했던 걸까요?
어쩌면 나와 비슷한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.
어제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더 슬프게 들렸어요.
그래서 그의 넋두리를 한참 동안 들어주었습니다.
이제 슬슬 일을 시작해 봐야겠습니다.

사랑이..사랑에게 말합니다.
전화번호를 바꾼다고 마음이 바뀌진 않는다고,
번역을 한다고 내용이 바뀌지 않는 소설처럼...

++ http://radio.sbs.co.kr/sweet/에서 담아왔습니다...


생각해보니까... 내 핸드폰은.. 6년넘게 같은번호다.. 동생이 제대했다고 지가 쓰던거 준 플립폰...
자꾸 저절로 꺼지고 문자 저절로 씹고... 그래서 바꿨지만.. 5년을 넘게 갖고 다니던거라..
바꿀때 너무 망설였다... 전화가 바뀐다고 내가 달라지는건 아닌데...
오랫동안 곁에 두고 있던것들을 떨쳐버린다는게 왜 이리 힘든건지..
아무튼.. 공감가는 말이다... 전화번호를 바꾼다고 마음이 바뀌진 않는다고...
번역을 한다고 내용이 바뀌지 않는 소설처럼...